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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이 닮았다.

주인공의 실낱같은 존재 증명의 고군분투기

발가락이 닮았다. 이 소설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김동인의 ‘나의 변명 -발가락이 닮았다-’에 대하여 라는 수필을 통해서 그 내막을 알 수 있다. 그 글에서는 제목처럼 변명이라도 하듯 답답한 마음을 토로 하고 있다. 염상섭을 모델로 한 작품이라는 오해 때문에 구구절절하게 자신의 난처함을 표현하는 것에서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의 파격과 객관적인 시각을 추구했던 작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주위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까 싶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그도 자신이 속한 인간관계에서는 나처럼 어쩔 수없는 범인(凡人)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략 염상섭은 이 소설에 모델이 될 수 없다는 내용과 그이유로 자신의 작화에 대한 신념, 그리고 그래도 오해한다면 그건 상대방의 문제라는 내용이 그를 보지 않..
발가락이 닮았다. 이 소설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김동인의 ‘나의 변명 -발가락이 닮았다-’에 대하여 라는 수필을 통해서 그 내막을 알 수 있다.

그 글에서는 제목처럼 변명이라도 하듯 답답한 마음을 토로 하고 있다.

염상섭을 모델로 한 작품이라는 오해 때문에 구구절절하게 자신의 난처함을 표현하는 것에서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의 파격과 객관적인 시각을 추구했던 작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주위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까 싶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그도 자신이 속한 인간관계에서는 나처럼 어쩔 수없는 범인(凡人)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략 염상섭은 이 소설에 모델이 될 수 없다는 내용과 그이유로 자신의 작화에 대한 신념, 그리고 그래도 오해한다면 그건 상대방의 문제라는 내용이 그를 보지 않아도 어떤 성격인지 또한 짐작하게 했다.

‘발가락이 닮았다’ 라는 소설을 전자책으로 출판때문에 써야 할 프롤로그를 위해 그를 인터뷰한 느낌이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발가락이 닮았다는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조작되어진 소설이다.

다시 읽어봤을 때 꽤 충격을 받았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거미줄처럼 가치관과 신념, 취향 등으로 재단되어진 내 머릿속에서 이 소설은 이곳 저곳 삐져나와 버린다.

한 남자의 고뇌를 옆에서 독자에게 전달하는 화자를 통해 짐작하게 하는 일들이 지금껏 기득권을 가진 한 성(性)이 누리고 죄책감 없이 행해지는 행위들에 대한 탄식 같은 것이리라.

표지의 의미는 매매 행위란 같은 무게로 거래되어진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돈을 주고 사는 행위도 결국 사는 사람과 돈을 주고 산 물건 혹은 그 구매한 대상과 꼭 닮아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존재의 무게란 겨우 찾아서 확인 하고 싶은 발가락이 아니라 발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

즉, 자연(自然)스러운 것임을 말하고 싶었다.
작가 김동인

1900년에 평양에서 출생, 1951년 사망하였다.

일본 도쿄 메이지학원 중학부 졸업,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중퇴하였다.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를 발간, 그 해 약한 자의 슬픔을 첫 작품으로 발표하였다.

1924년 8월에는 창조의 후신격인 동인지 영대를 간행해 1925년 1월까지 발간했으며 1933년4월 조선일보사 학예부에 근무했다.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월간 [야담]지를 발간하면서 이 잡지를 통해 광화사를 발표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8년 2월 4일자 매일신보에 산문[국기]를 쓰며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면서 일제에 협력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또한 1942년 1월23일자 매일신보에 감격과 긴장을 통해 태평양전쟁 학병과 징병을 찬양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1920~30년대, 간결하고 현대적 문체로 문장 혁신에 공헌한 소설가로 평가 받고 있다.

사실주의적 수법을 사용,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고 순수문학 운동을 벌였다.

주요 작품은[배따라기]1921 [감자]1925[광염소나타]1929 [발가락이닮았다]1932, [광화사]1935 등이 있다.

김동인은 수리사업과 영화사업에 실패하여 1930년에 들어 파산하고 부인의 가출로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설 쓰기에 전력을 쏟다가 몸이 쇠약해진 후에 안타깝게도 마약 중독에 걸렸다

고질적인 신경통과 뇌막염으로 결국 반신불수가 된 채 한국전쟁 때 피난도 못 가고 1951년 1월 5일 서울 홍익동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김동인은 작중인물의 호칭에 있어서 'he, she'를 '그'로 통칭하고, 또 용언에서 과거시제를 도입하여 문장에서 시간관념을 의식적으로 명백히 했으며,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이른바 간결체를 형성하였다.

당시 아직 이광수의 「무정」이 선보인 ‘이다’ 체에 머물던 초기의 시제에서 과거 시제인 ‘였다’ 체의 도입하고 삼인칭 서술자의 시점을 사용하는 등의 혁신적인 시도를 하였다.

그로인해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 과감한 생략을 통한 박진감 있는 사건 진행, 입체적인 성격의 인물 창조, 구성의 치밀함 등 한 차원 높은 소설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일생에 걸쳐 장편 15편 이상과 단편 75편 이상을 발표할 뿐 아니라, 각 작품 속에서 낭만주의·자연주의·탐미주의·사실주의 같은 다양한 경향을 시도한 것 또한 특징이다.

여러 가지 양식과 방법을 작품 속에서 실험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또한 신문학 초창기에 소설가의 독자성과 독창성을 강조하여 소설을 순수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1955년에 사상계에서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동인문학상을 제정, 시상하였으나 1987년부터 조선일보사에서 시상하고 있다.

2009년 7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그의 친일활동을 반민족친일행위로 결정하였다.

그의 친일행위는 오점이 아닐 수 없으나 김동인이 우리 현대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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